디자인 시스템에도 브랜딩이 필요할까?

당근의 디자인 시스템 SEED는 당근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낯선 로고를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SEED의 로고는 당근과 아주 밀접하게 닿아 있어요. 씨앗에서 뻗어나가는 뿌리를 닮았고, 그 뿌리는 결국 당근이라는 브랜드를 떠받치는 기반이 되거든요.
이 낯섦과 닮음 사이 어딘가에서, 브랜딩팀은 하나의 질문과 마주했습니다. 과연 우리끼리 쓰는 디자인 시스템에, 브랜딩이 정말 필요한지요. 당근의 로고는 이미 누구나 알아보는 견고한 자산이니, 그대로 쓰고 '당근 디자인 시스템'이라고 부르면 충분해 보였으니까요.
그런데 작업을 진행할수록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SEED는 당근만을 위한 가이드가 아니었어요. 누군가는 매일 아침 그것을 열어 보고, 그 안의 결정을 신뢰하고, 본인 작업의 기준으로 삼고 있었어요. 그렇다면 그건 제품을 만드는 도구에서 나아가, 당근이 만들어나가는 또 다른 제품에 가깝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사용자가 당근 이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와 엔지니어라는 것뿐이었죠.
이 글은 그 질문에서 출발해, SEED가 당근에 기반하면서도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하나의 브랜드로 완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담았습니다.
디자인 시스템은 왜 '공개'되고, 왜 '브랜드'가 되는가
도구가 브랜드가 되는 지점에 대하여
먼저 짚고 싶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규모 있는 디지털 프로덕트는 거의 예외 없이 디자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공개하지 않을 뿐이죠. 조직이 커질수록 디자인 의사결정을 한곳에서 관리하는 편이 압도적으로 효율적이고, 제품의 성숙도가 올라갈수록 그 시스템도 함께 성숙합니다. 그중 일부는 오픈소스로 코드와 문서를 열어, 누구나 참고할 수 있게 하기도 해요. SEED도 그렇게 공개된 디자인 시스템 중 하나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시스템은 굳이 바깥에 공개될까요.

공개된 디자인 시스템은 세 가지를 만들어냅니다. 첫째, 내·외부의 피드백을 받는 열린 구조. 둘째, 제품을 잘 만들고, 잘 관리하는 팀이라는 신호. 셋째, 그 신호가 채용으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실제로 많은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지원을 앞두고 그 팀의 디자인 시스템부터 들여다봅니다. SEED도 오픈소스 공개 이후 GitHub에서 800개가 넘는 별을 받았고, 채용 면접에서 지원자가 먼저 언급하는 일도 잦았거든요. 잘 관리된 시스템 하나가 "이 팀은 깊게 고민하는 팀이구나" 하는 인상을 대신 전해주는 셈이죠.
여기엔 한 가지 전제가 깔려 있어요. 디자인 시스템은 한 번 만들어 끝나는 결과물이 아니라, 공개한 이후에도 서비스와 함께 꾸준히 자라고 갱신되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컴포넌트가 늘어나고, 원칙이 다듬어지고, 새로운 맥락에 맞춰 계속 업데이트되죠. 구글의 머티리얼 디자인이 바로 그 좋은 예입니다. M2와 M3의 비주얼은 완전히 다르지만, 우리는 둘 다 구글 디자인의 기반이 되는 머티리얼 디자인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신뢰하죠.

결국 계속 변화하며 성장하는 시스템일수록 이름과 얼굴이 있어야 그 변화를 하나로 묶어낼 수 있고, 디자인 시스템이 브랜드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앞으로 웹, Lynx처럼 SEED가 닿는 플랫폼이 늘어날수록, 하나의 브랜드는 파편화를 막는 기준점이 되어줘요. 더구나 국내에서는 이런 공개 디자인 시스템을 꾸준히 운영해간 사례가 아직 많지 않아서, 그만큼 잘 가꾸고 오래 이어가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요. 그래서 SEED에도, 그에 걸맞은 새로운 브랜딩이 필요했습니다.
제품을 만드는 사람들을 위한 브랜드
사용자향 제품과 디자인 시스템의 브랜드는 같은 언어로 말하지 않습니다
브랜딩 방향을 잡을 때 가장 먼저 부딪힌 질문은, SEED가 ‘누구에게, 어떤 태도로 말하는가’였습니다. SEED는 당근이라는 따뜻한 서비스의 디자인 시스템입니다. 그렇다면 당근 앱의 친근하고 다정한 인상을 그대로 확장하면 되는 걸까요?

킥오프에서 나온 한 문장이 이 지점을 정확히 짚어줬습니다. 프로덕트와, 프로덕트를 만드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것이었어요. 사용자가 만나는 것은 완성된 프로덕트지만, 디자인 시스템과 대화하는 대상은 그 프로덕트를 만드는 전문가들입니다. 유저에게 건네는 말투와 동료에게 건네는 말투가 완벽히 같을 수 없듯, 디자인 시스템의 브랜드는 단순히 모브랜드의 확장판이 되어서는 안 됐습니다. 그 자체로 전문적이고, 믿음직하고, 지원자가 신뢰하고 선망할 수 있는 결을 가져야 했죠.
그렇다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정밀한 그리드, 차가운 모노톤, 추상적 그래픽. 그런데 그게 정답은 아니었어요. 테크스럽고 미래적인 방향은 사실 어떤 디자인 시스템에나 쓸 수 있거든요. 진짜 과제는 견고한 구조와 전문성 위에 당근만의 인상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였습니다. 이 균형점을 찾는 것이 SEED 브랜딩 전체를 관통하는 고민이었습니다.
무엇을 브랜딩할 것인가: 흩어진 언어에서 교집합 찾기
로고를 그리기 전에, '담을 것'을 먼저 정의했습니다
브랜딩이라고 하면 보통 아이덴티티가 되는 로고와 컬러부터 떠올리지만,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형태가 아니라 정의였습니다. SEED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이걸 정하지 않은 채로 그리기 시작하면, 결국 '예뻐 보이는 것'에 수렴할 뿐 '왜 이래야 하는가'에 답할 수 없으니까요.

방법은 이랬습니다. 당근이라는 조직 안에 이미 흩어져 있는 언어들을 한자리에 펼쳤어요. 컬처덱과 인재상에서 나온 조직문화의 언어, 모브랜드의 언어(Local·Connect·Life), 그리고 SEED가 프로덕트 차원에서 추구하는 언어를 카테고리별로 늘어놓았어요. 그 다음, 이 키워드들을 크게 둘로 나눠 봤어요. 어떤 말은 유저에게 친근하게 닿는 '유저를 향하는' 언어였고, 어떤 말은 제품을 만드는 구성원끼리 주고받는 '구성원을 향하는' 언어였어요. 그러면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고, 양쪽을 아우르는 말들이 있었거든요. SEED는 바로 그 겹치는 지점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추려낸 언어는 세 가지 핵심 가치로 좁혀졌는데, 공교롭게도 그 셋은 당근이 오랫동안 지켜온 브랜드 가치와 같은 이름으로 수렴했습니다.

- Local — 당근 프로덕트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인 SEED. 토큰 하나, 컴포넌트 하나에서 출발하는 하이퍼로컬의 시작점입니다.
- Connect — 당근의 구성원이 협업하고 연결되는 방식인 SEED. 디자이너와 엔지니어가 함께 쓰는 공통의 언어이자 일하는 방식입니다.
- Life — 당근이 성장할수록 같이 자라고 진화하는, 살아있는 생태계로서의 SEED입니다.
중요한 건 같은 단어를 쓰되 디자인 시스템이라는 제품의 관점에서 다시 정의했다는 점이에요. 이렇게 정리한 세 가지는 이후 모든 결정의 기준이 됐습니다. 로고든 컬러든 모션이든, 판단의 이정표는 늘 "이게 이 셋을 잘 드러내는가"였습니다.
씨앗에서 뿌리로, 뿌리에서 당근으로
Seed to Root, Root to Daangn
브랜드 컨셉의 중심에는 이름 그대로 ‘씨앗(Seed)’이 있습니다. SEED는 당근 프로덕트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자 모든 것의 시작점입니다. 이 작은 점 하나에서 컴포넌트가 만들어지고, 컴포넌트가 모여 스크린이 되고, 스크린이 모여 프로덕트가 되고, 끝내 당근이라는 브랜드가 완성됩니다. 이 흐름을 한 문장으로 압축한 것이 SEED의 슬로건, “Seed to Root, Root to Daangn.”입니다.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서로 소통하고 협업하며 더 단단해지고, 유기적으로 얽혀 마침내 당근을 이룹니다.

흥미로운 건 이 메타포가 두 개의 서사를 동시에 끌어안는다는 점이었어요. 하나는 디자인 시스템의 작동 방식(토큰에서 프로덕트로 확장되는 구조)이고, 다른 하나는 당근의 하이퍼로컬 가치(점=개인에서 이웃으로, 동네로 확장되는 연결)입니다. 최소 단위에서 출발해 점점 큰 그림을 이룬다는 점에서, 두 이야기는 하나의 시각적 메타포 안에서 정확히 공명했습니다.
하나의 로고에 세 개의 의미를
하이퍼로컬 지도 · 연결의 선 · 디자인 시스템의 구조
로고를 처음 마주하면, 여러 갈래의 길이 한 점에서 만나는 교차로를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형태가 눈에 들어옵니다. 가운데를 지나는 획에서 양 옆으로 이어지고, 한 갈래는 위로 뻗고, 또 한 갈래는 아래로 갈라집니다. 씨앗 하나에서 막 돋은 싹이 사방으로 뿌리를 내리는 모습 같기도 하죠.

이 단순한 실루엣 안에는 세 가지 의미가 겹쳐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본 동네를 닮은 하이퍼로컬 지도, 점과 점이 이어지며 네트워크를 이루는 연결의 선, 그리고 뿌리이자 컴포넌트가 가지를 뻗는 디자인 시스템의 구조. 특히 마지막은 당근 앱 화면의 '네거티브 영역'—UI 블록과 블록 사이의 빈 공간—에서 비롯된 형태입니다. 세 가지는 모두 '한 점에서 출발해 뻗어나가 연결된다'는 하나의 움직임으로 모입니다.
그래서 로고 모션에서는 점(씨앗) 하나가 선으로 뻗어 동네로 확장되는 시퀀스를 그대로 담았고, 로고의 쉐입에는 라운드 코너로 유연한 인상과 UI의 형태적 유사성을 반영하되, 획 속에 'S'를 은근히 숨겨두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건, 무엇을 택하지 않았는가 입니다. 좋은 심볼은 채택한 형태만큼이나 포기한 형태에 의해 설득력이 생기곤 합니다. 예를 들어 별이나 꽃 형태는 AI 서비스들이 워낙 많이 써서 차별화가 어려웠고요. 다리(bridge)는 연결을 뜻하기엔 너무 흔하고 중공업적인 인상이었고, 위빙(weaving)은 데이터 알고리즘만 강하게 연상됐어요. 텍스트버블이나 콜론(:) 기호는 메신저·채팅 서비스에 더 어울려 디자인 시스템과는 거리가 있었죠.
이렇게 '당근스러우면서 SEED만의 것'을 찾아 후보들을 하나씩 덜어낸 끝에, 세 가지 의미가 균형 있게 겹쳐진 지금의 로고에 도달했습니다. 생김새는 당근과 전혀 다르지만, 그 의미는 정확히 당근으로 이어집니다. 씨앗에서 뻗은 뿌리가 얽혀 당근을 떠받치듯이요.

가장 어려운 결정: 당근에서 출발하되, 당근에 갇히지 않기
부모 브랜드와의 거리를 조율하는 일
브랜딩 과정에서 특히 치열했던 지점은 ‘당근과의 거리’였습니다. SEED는 당근의 디자인 시스템이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제품입니다. 그렇다면 SEED는 당근 브랜드의 연장선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분명히 구분되는 새로운 브랜드여야 할까요. 이 질문에는 정답이 없어서, 작업하는 내내 고민이 이어졌습니다.
가령 컬러에서는 주황을 과감히 덜어내자는 의견과, 익숙함에서 너무 멀어지면 "이게 당근 맞나" 하는 낯섦이 생긴다는 우려가 맞붙었어요. 결국 저희가 택한 건 주황은 그대로 지키면서 새로운 요소를 더하는 방향이었어요. 당근을 상징하는 주황은 그대로 지키되, 코드 에디터 화면 속 하이라이트에서 따온 라임 컬러를 새로운 포인트 컬러로 더한 거죠. 주황이 '당근다움'을, 라임 컬러가 '디자인 시스템다운 전문성'을 맡는 식으로요.

이 긴장은 없애야 할 문제가 아니라 끝까지 안고 갈 좌표였어요. 예를 들어 같은 SEED 웹사이트라도 화면마다 무게중심을 다르게 잡았어요. 각 구성요소를 설명하는 문서 화면에서는 사용성을 위해 절제하되, 브랜드를 처음 마주하는 랜딩 화면에서는 이 시스템이 얼마나 다채롭게 확장될 수 있는지를 한껏 펼쳐 보였어요. 로고가 살아 움직이는 인트로, 스크롤에 맞춰 장면이 이어지는 인터랙션 시퀀스처럼요. 문서만으로는 전하기 어려운 SEED의 생동감을 담았죠. ‘당근에서 출발하되 당근에 갇히지 않는’ 거리를 계속 조율하는 과정 자체가, 이번 브랜딩의 본질이었습니다.

마치며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디자인 시스템에도 브랜딩이 필요할까요. 작업을 마쳐가는 지금, 답은 분명해졌어요.
브랜딩은 보이는 것을 만드는 일에서 끝나지 않았어요. SEED가 무엇이고, 어떤 원칙을 추구하며, 누가 어떤 태도로 만들어가는지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어내는 일이었죠. 그 정체성이 또렷해질수록 사람들은 시스템을 더 신뢰하고, 자기 작업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좋은 디자인 시스템이 디자이너의 수많은 의사결정을 대신 정리해준다면, 좋은 브랜딩은 그 시스템을 '믿고 쓰게' 만들어줍니다.

이번 작업은 당근의 브랜드 디자인이 닿는 영역이 한 뼘 넓어진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브랜딩이 '사용자에게 어떤 얼굴과 온도로 다가갈지'를 다뤄왔다면, 이번엔 제품을 만드는 도구에까지 고유한 언어와 얼굴을 입힌 셈이니까요. 물론 이 확장은 시스템을 단단히 쌓아온 디자인 시스템팀의 프로덕트 디자이너, 엔지니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제 SEED는 뚜렷한 정체성을 갖춘 하나의 디자인 시스템으로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당근 어디에도 없던 낯선 얼굴이었지만, 앞으로 뿌리가 뻗어나갈수록 SEED는 당근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토대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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